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30년 전쟁 (문단 편집) == 제4차: [[프랑스-스페인 전쟁]] ([[1635년]] ~ [[1648년]])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프랑스-스페인 전쟁)] 프라하 조약 이후로도 꾸준하게 충돌이 존재했다. 황제군은 프라하 조약을 통해 외국 세력을 몰아낸다는 명분으로 작센과 브란덴부르크를 포함한 거의 대부분의 제후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황제군에게는 해군이 없었기 때문에 해안 지대의 개신교 세력을 완전히 일소할 수는 없었다. 스웨덴 입장에서는 위대한 왕이 전사한 마당에 순순히 물러날 리가 없었으나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박살이 나는 바람에 처음 상륙한 포메른으로 후퇴해 버티기만 시전하는 중이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와의 평화가 유지되면서[* 폴란드 왕 [[브와디스와프 4세]]는 여자인 [[크리스티나 여왕]]을 대신하여 자신의 즉위를 제안했으나 옥센셰르나를 위시한 스웨덴 귀족들에게 거부당했다. 즉위하자마자 루스 차르국의 침공을 맞았던 브와디스와프 4세는 스웨덴 왕 칭호를 사용하는 조건으로 슈툼스도르프 협정을 체결하여 불필요한 전선 확장을 막았다.] 폴란드-리투아니아와의 전쟁에 대비해 준비했던 군대를 제국으로 보낼 수 있었고, 전장에 있던 재상 옥센셰르나가 [[스톡홀름]]으로 복귀하여 군대의 보급을 정상화시켰다.[* 당시 스톡홀름에서는 태후 마리아 엘레오노라가 어린 [[크리스티나 여왕]]을 사실상 감금하고 국정을 농단하고 있었으나, 재상이 복귀하여 이 문제를 해결했다.] 페르디난트 3세와 페르난도 데 아우스트리아는 아버지 세대와 달리 전쟁을 겪으면서 성장했던 세대였기에 종교적 열정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마드리드]]의 에스파냐 정부는 지속적으로 현지 사정을 잘 아는 페르난도의 정책에 태클을 걸며 통제하려 들었고, 에스파냐 본토에서는 인플레이션이 심화되어 페르난도를 지원할 경제적 여유가 부족해졌으며, 결정적으로 1640년에 [[포르투갈 왕정복고전쟁]]이 일어났다. 프랑스의 압박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를 지원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페르디난트 3세는 스웨덴과 강화를 맺으려 애썼으나, 포메른을 얻으려는 스웨덴의 의지와 프랑스의 막후 조정이 그를 좌절시켰다. 무엇보다도 국가 전체가 합스부르크에 포위된 프랑스의 입장에서는 무조건 전쟁에 참여해서 합스부르크를 몰아내야 했고, 제국 외부의 이해 관계로 전쟁은 계속 이어지게 되었다. 가톨릭의 대표적인 세력이면서도 합스부르크 가문과 경쟁관계에 있던 프랑스는 지속적으로 프로테스탄트 연맹을 지원하고 있었으나 황제군이 우세를 보이자 기어코 '''"스웨덴을 동등한 동맹으로 승인하고, 스웨덴을 배제한 강화를 거부하는 대신 프랑스는 라인 강 좌안을 얻는다."'''는 내용의 '''콩피에뉴 조약'''을 체결하여 전면적으로 참전했다. 프랑스는 독일 남부에 대한 침공을 개시하고, 프랑스의 침공에 호응해 스웨덴도 반격을 개시한다. 그러나 3차전까지 개신교 측에서 싸웠던 작센[* 작센의 경우는 프라하 조약의 영향이 컸는데, 프라하 조약에서 개신교 측에 북독일 지역의 교구를 내 주는 대가로 여기에 참가한 제후들은 독일에서 외국 세력을 몰아내야 했다. 이 때문에 작센이나 바이에른처럼 양측을 오가다가 조약에 서명한 제후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프랑스와 스웨덴을 적대하게 되었다.], 2차전의 주역이던 덴마크는 이번엔 황제측에 가담했다.[* 덴마크는 스웨덴을 몰아내려는 페르디난트 3세의 공작으로 오스트리아와 우호 관계를 맺었다.] 전쟁은 스웨덴군의 총사령관으로 사자왕 시절부터 적들과 싸워온 요한 바네르[* 이 사람은 후반기에 예전의 발렌슈타인과 비슷하게 스웨덴 정부의 통제를 벗어나 독일의 세속 군주를 노리는 군벌이 되었다. 그 때문에 스웨덴 정부가 골머리를 앓을 무렵 시의적절하게 사망하여 토르스텐손이 그 지위를 이어받는다.], 레나르트 토르스텐손 등의 활약에 힘입어 프랑스&스웨덴군의 우세로 흘러갔다. 프랑스는 뇌트를링겐 전투에서 패배했던 작센-바이마르의 베른하르트를 잘 구워삶아 알자스 지방을 점령했고, 때마침 베른하르트가 요절하는 바람에 그의 군대를 공짜로 조종할 수 있게 되어 더욱 승승장구하게 되었다. 반면 황제 측은 전쟁 초기와 달리 전장을 이끌 인재가 심각하게 부족했고, 그 때문에 연전연패를 반복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제국 전 지역이 오랜 기간 전쟁터가 되어서 이 시점에서는 오스트리아와 보헤미아의 자원이 바닥이 나 있었다. 스웨덴과 프랑스야 본토는 털리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든 자원을 쥐어짜낼 수 있었지만, 전쟁 말기가 되면 황제군은 자금이 완전히 떨어져서 군대를 소집하지도 못했다.[* 스웨덴도 상황이 비슷했지만 물주 프랑스가 있어서 파산은 면했다.] 1642년, 11년 전에 구스타브 2세가 황제군에게 굴욕을 안겨줬던 브라이텐펠트에서 황제군은 스웨덴군에게 또다시 패배했고, 작센은 스웨덴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결국 작센은 전쟁을 포기하며 1645년 스웨덴군과 화평을 맺고 전쟁에서 이탈했다. 새로이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로 즉위한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프라하 조약을 씹고 스웨덴과 독자적으로 평화 협상을 체결했다. 스웨덴군은 북독일과 보헤미아를, 프랑스군은 라인란트와 남독일을 휩쓸었고, 황제군은 최후의 반격으로 프랑스를 침공하나 보급이 하도 개판이라 군대가 침공 도중에 소멸당하는 비운을 겪으면서 이마저도 실패한다. 게다가 프랑스의 서부를 위협하던 에스파냐는 해상에서 네덜란드의 마아르텐 트롬프[* 오늘날 네덜란드의 함선에 그의 이름이 붙어있을 정도로 자국 내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는 해군 제독이다. 이후 [[영란전쟁]]까지 활약하다 전사하는데, 그의 후임이 그 유명한 [[미힐 데 로이테르]]였다.]가 이끄는 함대에 대패하고, 육지에서는 [[로크루아 전투]]의 패배로 사실상 자국 방어에 급급하게 되면서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1645년 얀카우 전투, 제2차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황제군은 연달아 대패했고, 1648년 베벨링호벤 전투로 쐐기가 박히며, [[페르디난트 3세]]는 [[프라하]]에서 굴욕적으로 도망가야 했다.[* 얼마나 자원이 떨어졌는지 스웨덴군이 프라하에 입성하려 했을 때 경비병도 없었고, 오히려 격렬한 저항으로 스웨덴군을 막아낸 것은 프라하 시민들이었다. 3개월 넘게 공격을 감행해 프라하 성을 비롯한 블타바 강 서안은 점령했지만 블타바 강 동안의 구시가지는 결국 점령에 실패했다고.] 황제는 평화조약을 맺고 싶어했지만 이젠 프랑스-스웨덴이 완전히 다 이긴 거나 다름 없는 상황이어서 황제의 평화 요청을 별로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황제 측의 상황도 극단적으로 나쁘지는 않았던 데다 아직 건재한 에스파냐도 무시할 수 없었다. 바이에른이 주축이 된 황제군은 프라이부르크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냈고, 이는 프랑스 입장에서 협상 테이블에 나올 동기가 되었다.[* 혹시나 바이에른이 완전히 황제 쪽에 붙으면 프라이부르크 전투 같은 일이 반복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지원을 받던 네덜란드는 로크루아 전투 이후로는 오히려 프랑스를 두려워하게 되어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둘 사이의 완충 지대로 남겨놓고 싶어했다. 또한 여차하면 오스만 제국까지 참전할 수 있는 상황이라 프랑스는 결국 협상을 받아들였고,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전쟁을 종결짓게 된다. [* 한편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전쟁은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에도 계속되어 1659년 [[피레네 조약]]으로 종결되었다.] 베스트팔렌 조약은 당시까지 명목상 계속되던 에스파냐의 네덜란드 지배를 공식적으로 종결시켰고, 네덜란드와 [[스위스]]는 독립국의 지위를 얻었다. 신성 로마 제국의 영방국가들에겐 <황제와 제국을 적대하지 않는 한에 있어서>란 조건하에 상호 또는 외국과의 동맹을 비롯한 거의 완전한 통치권을 부여[* 30년 전쟁 전에는 선제후들만이 이러한 권리를 누릴 수 있었다.]함으로서 황제의 직위는 사실상 이름만 남는 상태가 되었다.[* 다만 신성로마제국이라는 국가 자체는 19세기가 되는 1806년까지 유지된다. 30년 전쟁이 끝나고도 거의 160년을 버틴 것이다.] 또한 에스파냐는 유럽의 패권을 잃었고 그 대신 프랑스와 스웨덴이 패자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